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외주할 수 없습니다: 외주해도 되는 사고, 외주해서는 안 되는 사고
홍진기 연세대학교 화공생명공학과 교수, 『사고외주』 저자

비영리 현장은 그 어느 곳보다 사람이 진하게 남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업명이나 후원금 액수, 성과 지표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정작 오래 남는 것은 어느 겨울 상담실에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사람의 표정일 때가 많습니다. 회의록에는 기록이나 보고서의 숫자로는 설명되지 않는 작은 변화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 다음 행동을 이끄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비영리의 일은 세상이 쉽게 지나쳐버린 사람과 문제를 끝까지 잊지 않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일을 지켜내는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사람은 부족하고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일이 점점 버거워집니다.
이런 현장에서 AI는 분명 큰 도움이 됩니다. 자료를 요약하고, 회의록을 정리하고, 문장을 번역하고, 보고서의 초안을 만드는 일에 AI를 활용하면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확보한 시간을 다시 사람에게 돌려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술이 해야 할 역할일 것입니다.
문제는 AI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사고를 똑같은 속도와 표정으로 처리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는 ‘처리하는 사고’입니다. 이미 주어진 자료를 정리하고 목적에 맞게 표현을 다듬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씨름하는 사고’입니다.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옳은지 답이 없는 질문 앞에 오래 머무는 일입니다.
눈앞의 사람을 ‘수혜자’라고 부를 것인지 ‘동료’라고 부를 것인지, 그의 사연을 후원자에게 공개할 것인지 지켜줄 것인지, 우리의 활동을 시혜라고 부를지 연대라고 부를지 판단하는 일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앞의 사고는 AI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까지 넘기는 순간, 활동의 본질은 조용히 사라질 수 있습니다.
AI는 불확실성을 빠르게 정리해줍니다. 여러 가능성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답을 제시하고,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바꾸어줍니다. 그러나 비영리 활동의 중요한 질문들은 본래 쉽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지, 서로 충돌하는 권리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더디게 오는 변화를 기다릴 수 있을지는 불편함을 견디며 생각하고 때로는 어려운 결정을 용기 있게 내려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AI가 내놓은 매끄러운 답을 보면서, 지금 문장을 다듬게 한 것인지 질문 자체를 대신하게 한 것인지 놓치기 쉽습니다. 외주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고의 외주가 가장 위험한 이유입니다.
한 가지 위험은 더 있습니다. AI의 답은 세상에 축적된 수많은 말과 판단을 바탕으로 만들어집니다. 결국 자주 등장했던 관점과 널리 받아들여진 상식을 그럴듯하게 재구성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비영리는 다수가 보지 못했거나, 보면서도 외면했던 것을 발견하기 위해 존재해왔습니다. 아무도 문제라고 부르지 않던 일을 문제라고 부르고, 당연하게 여겨지던 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통계의 평균에서 밀려난 한 사람의 목소리를 사회의 중심으로 옮겨왔습니다.
AI는 세상의 평균을 능숙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꾼 질문은 대부분 평균 밖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생각을 직접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반복되는 문서 작성과 형식적인 정리, 번역과 자료 조사에는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생각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습니다. AI를 잘 활용한다는 것은 가능한 모든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맡겨도 되는 일과 끝까지 자신이 붙들어야 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I와 함께 일하기 전에 한 번만 멈춰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을 외주할지 결정하는 사고만큼은 외주하지 않아야 합니다. AI 시대에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은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하는 힘이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지 판별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보고서와 제안서, 회의록과 보도자료의 대부분을 AI가 작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쉽게 결론 내리지 않고 머무는 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왜 이 일을 하는가”라고 스스로 묻고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은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에 계신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기계는 앞으로 더 빠르고 유능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영리 활동가는 기술과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역할을 더 선명하게 지켜야 합니다.
AI에게 문장은 맡겨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이해하는 일만큼은 끝내 우리 곁에 남겨두어야 합니다.
✍ 홍진기 | 연세대학교 화공생명공학과 교수, (주)바른바이오 대표이사
고분자·바이오소재와 인간을 위한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 『사고외주』를 통해 AI가 인간의 판단과 사유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며, 기술이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져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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