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 AI 시대에 사라진 청소년의 목소리
김재순 유스보이스 대표

AI가 청소년들의 삶 깊숙이 들어왔음을 체감한 것은 재작년(2024), 지원서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전에는 50자, 100자를 채우는 것조차 어려워하거나 건성으로 쓴 듯한 글이 더러 보였고, 자연스럽게 ‘분량’과 ‘성의’가 심사의 한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는 지원서 분량이 전반적으로 늘어났고, 글의 수준도 눈에 띄게 평준화되었다. ‘분량이 곧 성의’라던 기존의 기준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달라진 지원서들을 접하며 나 역시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심사 기준을 갖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늘어난 분량 때문에 심사가 더 까다로워졌다고 느꼈지만,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 ‘진짜 자기만의 서사’가 있는지 없는지가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AI에게는 없지만 인간에게만 있는 것, 바로 ‘서사’이다. 한 개인의 삶이 온전히 담겨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서사가 담겼는가를 기준으로 삼으니 심사 자체는 오히려 수월해졌지만, 아쉽게도 마음을 움직이는 지원서는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예전의 청소년들은 짧은 신청서를 쓰더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약간의 성장통을 겪으며 글을 채워 나갔다. 그 고민의 과정에서 ‘내가 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은지’ 스스로 동기를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딸깍’ 한 번이면 완성되는 매끄러운 문장에 자신을 맞추어 신청서를 쓴다. 너무나 손쉽게 글이 만들어지다 보니, 아이들 스스로도 프로젝트에 임하는 자신의 진짜 의지와 동기를 들여다볼 기회를 놓치고 만다. 신청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창작’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2025년 여름, ‘TMI 프로젝트’(자아탐색 창작 지원사업) 오리엔테이션에서 청소년 두 명이 늦은 밤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동아리 친구들과 글을 써서 출품한다기에 “정말 대단하다, 어떤 주제야?”라고 물으니, 아직 고민 중인데 내일까지 출품이라고 했다. “그렇게 빨리 쓸 수 있어?”라고 되묻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ChatGPT로 쓰면 돼요.” 그 뒤로 더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작은 충격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이렇게 창작을 해도 되는 걸까? 결과만 남기는 활동이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기게 할까?’ 그날 밤, AI를 그저 신기하고 필수적인 역량으로만 여기던 생각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렇게 청소년에게 신청서든 창작이든 무언가 결과를 만드는 일에는 AI가 어느새 필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은 분명하다. 이들의 글에서 ‘자기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AI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무엇을 원하고 말하고 싶은지 아는 사람에게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도구이다. 그런데 아직 ‘무엇을 알고, 무엇을 원하고 말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도 스스로에게 해보지 못한 채, 결과부터 만들어내는 데에 청소년들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유스보이스에서는 학교 밖 청소년의 에세이가 한 지역 학교와의 협업 사업으로까지 이어진 사례가 있었다. 그 지역의 한 선생님이 학교 밖 청소년의 에세이를 읽고, 몸은 학교에 있지만 마음은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학생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 직접 제안해 ‘TMI 프로젝트’를 운영할 수 있었다. 한 청소년의 이야기가 울림을 주었고, 그 울림이 한 학교의 프로젝트 실행으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울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딸깍’ 한 번이, 그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창작의 과정을 빼앗아가 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정말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시대에,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힘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깊이 고민하며 ‘글을 읽고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그런 능동적 행위를 직접 경험할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영상을 보는 대신 책을 읽게 하는 것, 활동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활동을 이끌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능동적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비로소 ‘내 것’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유스보이스는 최근 습관형성 프로그램 ‘한끗루틴’에서 파생된 ‘한끗독서’를 진행하고 있다. 15일간 매일 책을 읽고 인증하고, 마지막 날에는 독립서점에 모여 함께 소감을 나누는 활동이다. 한끗루틴을 운영하며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주변에 방해 요소가 많아 혼자서는 꾸준히 읽기 어려워서 함께 읽고 싶어 참여한 것이었다. 온라인으로 진행되지만 함께 읽으니 매일 한 장, 단 10분이라도 읽게 되었고, ‘읽는 근육’이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역에서도 함께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시작된 것이 지역 독립서점과 함께 진행되는 ‘한끗독서’다. 지금이야말로 이런 경험이 더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시대는 늘 변해왔고, 그때마다 청소년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미디어 교육, STEM 교육, 코딩 교육, 유행처럼 지나간 ‘4차 산업혁명’, 그리고 이제는 AI 교육까지. 마치 지금 이 교육을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유행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아이들 각자의 서사이고 나다움이다. 더는 어른들의 조바심으로 아이들을 기술에 의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나다움’이라는 내면의 근육을 함께 길러주는 일이 많아지면 좋겠다.
✍ 김재순 | 유스보이스 대표
청소년들이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깊이 고민하고 유쾌하게 해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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