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화이트 자국’을 남기는 일

최유민 (사)온기 부대표

지금, 이 순간에도 노란 우편함에는 누군가의 고민이 도착한다. 한 통의 편지를 쓰는 데는 2시간, 답장이 전해지기까지는 4주가 걸린다. 편지 한 통에는 430원짜리 우표를 붙이고, 답장이 4장을 넘으면 50원짜리 우표를 더 붙인다.

그런 온기에서 AI를 접했을 때의 첫 감정은 거부감이었다. 고민을 말하면 3초 만에 답변을 주고, 마지막에는 언제든 옆에 있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사용자의 말투와 특성을 빠르게 습득해 듣기 좋은 말을 건네는 AI를 보며 왠지 모르게 ‘우리만은 끝까지 아날로그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라는 책임감도 찾아왔다.

물론 편지 쓰기는 실무의 극히 일부분이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전한 고민과 마음을 다해 쓴 답장을 잇는 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닿는 이 일에 AI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딜레마와 마주하며 선택한 방법은 더 많은 AI와 대면하는 것이었다.

구조화에 강한 AI, 코딩에 강한 AI 등을 다뤄 보며 관성적으로 해오던 크고 작은 업무들의 효율화와 자동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것들을 더 빠르게 테스트해 보면서 다음 스텝에 대한 고민이 가능해졌다.

얼마 전에는 온기우편함 옆에 놓인 고민 편지지와 유사한 형태의 페이지를 만들었다. 일상에서 고민을 타이핑하면 손글씨로 편지지 위에 적는 것처럼 구현되는 공간이다. 지금은 후원금이 우편함 제작과 설치부터 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손편지 답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방식을 테스트하고 있다.

AI 덕분에 오프라인의 경험을 온라인으로, 온라인의 접점을 오프라인으로 이어갈 수 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부분적인 효율화를 통해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온기는 변함없이 사람 냄새를 찾는 조직이다. AI로 포스터를 만들 수 있지만 여전히 잘 그리지 못하는 손그림과 글씨로 포스터를 만들고, 3초 만에 건네주는 답 대신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편지에 풀칠해 우체국으로 향한다.

어쩌면 AI가 그토록 어렵고 멀게 느껴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목표는 효율이나 속도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AI를 쓰면서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 조직인지 더 선명하게 알아가고 있다.

손편지 답장을 받은 한 분이 편지 곳곳의 화이트 자국이 위로가 되었다는 후기를 전해주신 적이 있다. 그 자국 하나하나에서 오롯이 나를 위해 고심한 시간과 흔적이 느껴졌다고 했다.

어쩌면 그 ‘화이트 자국’은 온기뿐 아니라 수많은 비영리 단체가 세상에 남기고 있는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정량으로는 담길 수 없는, 세상의 속도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누군가에게, 현장 속에 닿고 있을 흔적들 말이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온기에서 AI를 쓰는 이유는 어떤 모양이든 4주를 기다려 도착하는 손편지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을 끝까지, 느리게 지킬지 고민을 놓지 않기를 바라본다.

 

✍🏻 최유민 | (사)온기 부대표
단 한 사람도 외롭지 않도록, 가장 따뜻한 편지를 보내는 온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손편지로 한 사람의 세상을 지키는 일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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